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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t 분당 100m씩 나르는 대형 엘리베이터 만들어 덤프트럭 지하로 내려보내 터널 길이만 모두 11.2㎞… 쏟아지는 바닷물 유입 막으려 8m 팔 때 틈새에 시멘트 채워 석유증기 잡는 인공수막이 모세혈관처럼 퍼져…한때 싱가포르의 관광명소였던 주롱(Jurong)섬. 지금은 싱가포르 정부가 대규모 석유물류기지로 개발 중인 차세대 싱가포르의 경제동력으로 탈바꿈 중이다. 지난달 29일 주롱 석유화학단지 주변을 달리던 대형 덤프트럭이 건물 5층 높이의 철재 구조물에 들어가더니 갑자기 사라졌다. 7~8분쯤 지나자 이번엔 시꺼먼 돌덩이들을 가득 싣고 나왔다. 트럭은 대형 리프트를 타고 지하 130m로 내려가 터널 공사 현장에서 나온 돌을 싣고 올라온 것이다. 리프트를 타고 1분쯤 내려가자 어둠 속에 암반을 깨는 천공(穿孔) 소리, 포클레인·불도저가 뿜어내는 매캐한 연기가 밀려왔다. 그리곤 거대한 동굴이 나타났다.
- ▲ 현대건설이 싱가포르 주롱섬 앞바다 130m 아래에 짓고 있는 해저 석유 비축기지 공사 현장. 석유 저장시설로 이용될 거대 동굴은 고속도로 왕복 4차로의 터널 크기와 비슷하다. 천장에는 지름 1m의 송풍관이 설치돼 지하 깊은 곳까지 맑은 공기를 공급한다. /싱가포르=홍원상 기자
이곳은 현대건설이 2009년 6월부터 건설 중인 주롱섬 해저 석유비축기지 공사 현장이다. 주롱섬 앞바다의 해저 130m 지하 암반을 뚫고 147만㎥ 규모의 비축기지(약 925만 배럴)를 짓는 거대 프로젝트다. ◆ 45t 중장비를 나르는 초대형 리프트
총 사업비 7억1400만달러(약 7700억원)가 투입되는 주롱섬 해저 석유비축기지는 일반 도로터널이나 광산과 달리 다양한 최첨단 건설공법이 필요하다. 단순히 암반을 깨고 넓은 공간을 만드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하 130m 지점에 각종 운전시설과 유류 저장탱크(길이 400m×2개) 5기(機)를 1층과 2층으로 나눠서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전체 터널의 길이만 11.2㎞. 이 때문에 건설 장비들이 쉴새 없이 지나다니는 폭 20m×높이 9m의 터널은 미로와 같았다. 리프트에서 내려 200m쯤 들어가자 좌우로 길이 나뉘고 여기서 200~300m를 더 걸어가면 다시 새로운 동굴이 나온다. 석유 저장량이 30만t급 초대형 유조선 다섯 척과 거의 맞먹는다. 초대형 프로젝트답게 현장 장비에도 '대형'이라는 단어가 빠지지 않는다. '점보 드릴', 대형 불도저(휠로더), 덤프트럭…. 이 장비를 나르기 위해 설치된 리프트(4개) 역시 초대형·초고속이다. 45t짜리 점보드릴을 지하로 실어 나르는 데 1분20초면 족하다. 현대건설 김영 현장소장은 "고층 빌딩에 달린 엘리베이터 속도(분당 90~120m)와 맞먹는 리프트를 설계·제작하는 데만 10개월이 걸렸다"며 "총 200만㎥의 암석을 파내려면 리프트 한 대당 하루에 150번씩 왕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 암반 틈새를 모두 시멘트로 채워동굴의 천장 곳곳에선 물이 뚝뚝 떨어졌다. "여기서 곧바로 110m를 올라가면 바다입니다. 암반 속에 스며든 바닷물이 작은 틈새를 타고 동굴 안으로 계속해서 들어옵니다."(문갑 관리부장)
- ▲ 현대건설 김영 현장소장(왼쪽부터)과 문갑 관리부장, 이영근 차장이 해저 동굴의 천장과 벽면에 처리한 ‘그라우팅’ 작업을 점검하고 있다. /싱가포르=홍원상 기자 wshong@chosun.com
지하 암반을 뚫을 때 가장 어려운 것은 바위산 같은 암벽을 깨는 것보다 곳곳에서 쏟아지는 바닷물을 막는 것이다. 작년 1월에는 당초 예상보다 10배 이상 많은 바닷물이 터널 안으로 밀려와 발파작업은커녕 시멘트로 물줄기를 막는 데만 다섯 달 가까이 허비했다. 암반 속 해수의 압력은 10바(bar) 정도. 수심 100m에서 전해지는 압력이다. 이를 위해 '그라우팅(grouting)' 작업을 먼저 해야 한다. 드릴로 직경 4.5㎝의 작은 구멍을 15~20m의 깊이까지 뚫은 뒤 시멘트를 주입, 주변의 작은 틈새들을 모두 채워넣는 것이다. 이영근 차장은 "수압을 이기려면 15~25바 정도의 더 높은 압력으로 시멘트를 쏴야 한다"며 "그래도 틈새를 메우지 못해 일주일 내내 같은 작업만 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 모세혈관처럼 퍼져 있는 워터 커튼많게는 10여개의 터널을 동시다발적으로 뚫다 보니 자칫 동굴 자체가 무너질 수도 있다. 현대건설은 그 보완책으로 발파 작업으로 파낸 암반 벽면에 경화재를 섞은 콘크리트를 고압으로 뿌려 5~15㎝ 두께로 덧바르는 '숏크리트(shotcrete)' 작업을 택했다. 아울러 터널 천장과 벽에 2~3m 간격으로 5m 길이의 FRP(유리섬유강화플라스틱) 볼트 20만개를 촘촘히 박아 바위들을 잡아당겨주는 '록볼트(rock bolt)' 작업도 했다. 해저 유류기지에서 가장 주의해야 할 부분은 석유증기(oil vapour·기름이 증발하면서 생긴 기체)다. 석유증기가 시설물 안에 퍼질 경우 직원들이 질식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자칫 폭발로 이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석유증기가 다른 터널이나 운영시설로 퍼지지 않도록 인공 수막(워터 커튼) 공법이 도입됐다. 저장탱크마다 30m 떨어진 곳에 수평으로 작은 터널(폭 5m×높이 6m)을 만들고 이곳에서 다시 10m마다 지름 10㎝의 구멍을 수직으로 70m까지 뚫어 물을 채우는 방법이다. 그러면 터널 주변의 암반 사이로 물이 모세혈관처럼 퍼져 석유증기를 가두게 된다. 섭씨 36도에 육박할 정도로 한증막을 방불케 하는 지하 동굴에 들어가자 30분도 채 안 돼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이런 무더위와 어둠 속에서 현대건설을 비롯한 현장 직원 200여명은 2014년 5월 해저 석유비축 기지 완공을 위해 하루 24시간 작업을 벌이고 있다. 지난 5월 말 현재 전체 터널의 약 40%(4.1㎞)를 파냈다. 김영 소장은 "석유 비축기지가 완공되면 그동안 국내 토목 건설의 미개척 분야로 남아있던 지하 건축물 공사에도 엄청난 변화가 시작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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